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이온지 긴모치 (문단 편집) === 제1차 호헌 운동 === ||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12.jpg]] || || 총리 재임 시절 || [[1908년]] 총선에서 [[정우회]] 소속으로 승리했지만 경제 문제를 못 풀어 얼마 뒤 끝내 총사퇴했다. 민간에서 경기 회복의 일환으로 요구하던 [[러일전쟁]]의 전비조달로 올라간 세금을 못 내렸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경기불황이 러일전쟁의 전쟁 차관까지 겹치면서 일어나니... [[1911년]] 2차 임기 시절에도 재정 악화와 군비 확충 문제로 애를 먹었는데, [[러일전쟁]] 종결 이후 전비 조달을 위해 발행된 막대한 액수의 공채로 말미암아 국내/외로 원금과 이자를 정부 재정으로 상환을 위해 긴축 재정을 추진하였다.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기반으로 하는 여당 정우회가 중의원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 것도 있었기에, 이대로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1913년(다이쇼 2년)의 예산책정을 대상으로 세출 1할 삭감을 목표로 했지만, 육군은 2개 사단의 증설을 요구하고, 해군도 또한 전함 3척 건조를 예산안에 포함시켰다. 전 내각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긴축재정을 실시하는 상황에서 예외를 둘 수는 없었고, [[군국주의]]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군대는 그 특성상 돈만 잡아먹지 생산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긴축을 할 때 가장 많이 축소해야 하는 분야에 속한다. 러일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사이온지가 받아들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제안이었던 것. 이에 육군은 사이온지 내각을 전복시켜서라도 2개 사단 증설을 달성하기 위해 분주했고, 내각이 끝까지 거부방침을 나타냈기에 우헤하라 유사쿠 육군대신은 천황에게 직접 사표를 제출했다. 육군대신에게는 직접 천황에게 상주하는 유막상주가 제도상 인정되고는 있었지만, 각료가 수상을 통하지 않고 직접 천황에게 사표를 제출한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또, 육군이 후임육상을 내지 않는 한 사이온지 내각은 육상을 얻지 못한 채 사임할 수밖에 없어, 당시 육상사임의 영향은 매우 컸다(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사이온지는 이후 [[다이쇼 덴노]]에게 불려가 천황의 입에서 육상의 사표 제출을 알게 되었다. 그는 후임의 육상에 대하여 육군의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상담했으나, 야마가타가 후임의 육상을 낼 생각이 없는 것을 헤아리자, 기선을 억제해 총사직했다. 이를 다이쇼 정변이라고 하는데, 정우회를 통하여 내각 총사직의 내막이 널리 알려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갑자기 벌족 타파, 헌정 옹호의 기운이 높아져 제1차 호헌 운동이 일어났다. 정우회는 입헌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29대 총리) 등과 제휴해, 호헌운동의 진두에서 사이온지 내각의 후임 내각인 제3차 가쓰라 내각과 대립했다. 다만, 정국 제휴나 국민을 향한 연설회 등에 사이온지는 직접 터치하고 있지 않은 것 같고, 이것들은 정우회의 간부로 있던 [[하라 다카시]](原敬)나(19대 총리), 마쓰다 마사히사(松田正久)(중의원 의장, 대장대신, 문부대신, 사법대신 역임) 등과 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20대 사법대신)가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의회는 원래부터 정우회가 절대다수였으므로, 의회가 개시되자 정우회와 국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해 가쓰라 내각은 궁지에 처했다. 거기에, 벌족 측에서는 영국의 [[조지 5세]]가 즉위한 때에, 즉위 직후인 것을 이유로 자유당과 보수당과의 정쟁을 금지하기 위한 명령을 실현시켰다고 하는 이야기를 모방해, 흡사 다이쇼 천황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으므로 칙어를 내는 형태로 사이온지 킨모치에게 정쟁을 중지하도록 설득했다. 정우회에서는 천황의 의사라면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며 불신임안을 철회했고, 일단은 가쓰라 내각에 은혜를 배푸려는 의견이 한때 유력하게 되었지만, 이것에 국민당의 오자키 유키오가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이누카이 쓰요시의 조언으로 사이온지는 정우회 총재를 사임해, 정우회 자체는 끝까지 내각퇴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때에 해군의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정우회 본부를 격려를 위해서 방문했다.[* 같은 군인인데 왜 야마모토가 육군인 [[가쓰라 다로]] 편을 안 들고 정우회 편을 들었나 의아할 수 있는데, 일본군은 창군 초기 이미 육해군의 뿌리부터가 달라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육해군 간의 세력 다툼이며 자존심 싸움이며 모든 것이 사사건건 부딪혔다.]] 게다가 해군은 조금 더 문민적이고 군인색이 옅었고, 특히 야마모토는 비교적 온건파였다. 야마모토가 취임 후 군부를 억제하려는 정책으로써 내놓은 게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의 폐지였다.] 결국, 호헌 운동의 고조로 가쓰라 내각은 1913년 2월 11일에 총사직해, 동일 후계 수상을 결정하기 위한 원로회의가 열렸다. 이때의 회의에는 사이온지도 처음 원로로서 출석했다. 그러나 정우회의 대표로서 출석은 결코 아니었다. 회의에서는 처음엔 사이온지가 후계 수상에 추천되었지만, 이것을 받으면 칙어에 반하게 된다고 하여 사이온지는 사양했다. 결국, 후계 수상은 [[야마모토 곤노효에]]로 정해졌다. 이후 야마모토 내각은 지멘스 사건이라는 희대의 부패 스켄에 걸려 총사퇴한다. 이후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프랑스]] 유학 시절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와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일본 제국 대표단의 전권수석으로 임명되어 [[파리(프랑스)|파리]]에 파견되었으나 실질적인 임무는 전권차석인 마키노 노부아키가 담당하였다. 이때 일본 제국 대표단의 구성이 엄청난데 [[요시다 시게루]](吉田茂)(45, 48-51대 총리), [[아시다 히토시]](芦田均)(47대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고셋케의 수장이자 34, 38, 39대 총리),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61, 64, 75-77대 외무대신),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2차 대전 직전 미 주재 일본 대사), [[마츠오카 요스케]](松岡洋右)(2차대전 직전 외무대신) 등 전간기, 태평양 전쟁기, 전후 일본의 외교와 정계에서 활약한 정치가와 외교관들이 가득하다. 위의 임기표를 보듯이 [[1900년대]] 초반의 일본총리직은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사이온지가 돌려막기식으로 역임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영향을 세게 받은 일본 군부 내 [[조슈]] 강경파의 카츠라와 조정원로 가문의 온건파 사이온지가 서로 실각할 때마다 총리에 올랐기 때문. 이 때문에 이 시기를 가리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케이엔(桂園) 시대라고 부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